[책마을] 현대 무용에 비친 전쟁의 광기

입력 2022-03-10 17:59   수정 2022-03-11 00:47

1913년 5월 29일 파리 상젤리제 극장. ‘세기의 흥행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발레단(발레 뤼스)의 신작 ‘봄의 제전’이 무대에 펼쳐졌다. 봄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살아있는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이교도의 제의(祭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고전 발레의 우아한 형식을 파괴한 니진스키의 기괴한 안무와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 정신 사나운 리듬으로 가득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객석은 동요했다. 반대파와 지지파로 나뉘어 격론이 벌어지고 고성과 야유가 오가는 혼란 속에서 공연은 황급히 막을 내렸다.

《봄의 제전》은 혁신의 아이콘이 된 모더니즘 대표 발레 작품의 초연 현장에서 출발해 제1차 세계대전의 최대 격전지인 서부전선 전장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라트비아 출신의 캐나다 역사학자 모드리스 엑스타인스가 1989년 펴낸 이 책은 폭넓은 문화사적 관점에서 1차 대전이 ‘현대의 탄생’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다각적으로 탐구한다.

‘봄의 제전’에서 제물로 선택된 처녀는 삶의 에너지와 환희에 떨며 열정적으로 춤을 추다가 죽음을 맞는다. 희생양에겐 애도를 보내지 않는다. 영예롭게 기릴 뿐이다. 저자는 서부전선에서 대치한 이름 모를 병사들을 스트라빈스키의 ‘제물’로 바라본다. 1914년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서 전장을 향한 이들은 봉사와 의무의 관념이 충만한 중간 계급이었다. 이 전쟁은 역사상 최초의 중간 계급 전쟁이었고, 이 계급의 가치가 병사 개인의 행위를 결정했다. 역사적 진보나 문명의 보존, 애국적 민족주의와 같은 이상적이고 고상한 관념이 이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전쟁이 무수한 희생을 요구하는 소모전으로 흐르며 이런 추상적 이념은 흐릿해졌다.

9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전쟁은 예술도 변화시켰다. 희망의 문화이자 종합의 비전이던 모더니즘은 악몽과 부정의 문화로 탈바꿈했다. 삶의 의미라는 근본적 질문에 답할 수 없자 삶 자체에, 순간의 생생함에 집착했다. 그 결과 1920년대에 향락주의와 허무주의가 나타났다. 저자는 ““이른바 ‘고속 질주하는’ 삶과 더불어 현대인이 속도와 새로움, 일시성, 내향성에 열중하는 동안 가치와 신념체계 전체는 뒤로 밀려났다”며 “1차 대전은 이런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강조한다.

3막 10장의 드라마 구성으로 풀어낸 역사 서술이 흥미롭다. 병사들이 남긴 일기와 편지 등 풍부한 사료를 재구성하는 작가적 솜씨가 돋보이지만 그만큼 주제에 맞춘 자료 선택과 주관적인 해석도 드러난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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